당신에게 다다른 #62번째 레터 : 가을
2023/10/19
당신에게 다다른 #62번째 레터
🍁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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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빨리 찾아온 듯한 올해 가을입니다. 저는 사실 계절을 타는 편이 아니에요.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수영을 하고 스프를 먹을 궁리나 합니다. 그래서 이번 가을도 부지런히 트렌치 코트를 입고 전어나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호를 쓰고 읽으며 ‘가을의 정수’를 감히 느꼈답니다. 신기하게 모든 글이 처음부터 매끈하게 쓰여 기분이 참 좋기도 했고요. 센치해지는 가을이라 그런지, 님의 반응이 어떨지 더욱 궁금하고 신경이 쓰여요. 초가을이다. 답장 꼭 줘.
- 엘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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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 황무지 위 두 예술가 🍂
[ 영화 ] 2537번. 돌아가는 중입니다. 🚍
[ 음악 ] 자네, 기타와 벤조를 들게!
[ 트렌드 ・ 대중문화 ] 축제로 가을 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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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인간을 쓸쓸하게 합니다. 단풍의 알록달록함은 찰나일 뿐이고, 곧 이어질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나뭇잎을 우수수 떨어뜨리거든요. 🍂 황무지 위 사뭇 서늘해진 바람을 맞는 인간은 공허를 메우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릴케와 안젤름 키퍼도 그중 하나예요.
독일 현대 미술가 안젤름 키퍼는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자신의 집이 영국군에 의해 폭격당한 날 태어났어요. 🏚️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가지고 놀며 자라난 키퍼는 유독 ‘공허’와 ‘고독’에 마음이 기우는 아티스트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독의 아름다움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인 릴케의 굉장한 팬이 되고, 팬심은 그대로 영감이 되어 개인전 《가을 Herbst》의 작업물로 이어집니다. 🍁 릴케의 시 「가을」, 「가을날」, 「가을의 마지막」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들은 두 사람의 예술세계가 합쳐져 아름다운 쓸쓸함으로 표현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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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겉보기엔 버려진 황무지의 느낌을 주기도 해요. 그러나 작품에 쓰인 납과 금박이라는 재료가 연금술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는 걸 염두해 보면, 그가 바라본 가을이 결국은 다가올 봄을 품고 있는 계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치 작품인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는 흙과 지푸라기로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어졌어요. 🧱 흙에서 시작해 흙으로 돌아가는 재료의 성질은 작품을 사라져 가는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느끼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 릴케 「가을」 중
황량한 가을을 떠올려 봅니다. 색도, 냄새도, 온기도 앗아가는 이 계절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어느덧 비워야 할 계절이 왔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욕심을 내려놓고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요. 👤 하나씩 늘어가는 빈자리를 보는 인간은 쉽게 우울해지고 모든 것이 덧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릴케와 키퍼는 조심스레 제안합니다. 비워내는 과정은 다시 채우기 위함이라고. 빈자리를 채울 다음 봄을 희망으로 기다려보는 것이 어떠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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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축축한 바닥, 짙게 깔린 안개, 찬바람을 막아줄 트렌치코트와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 영화 <만추>의 풍경은 대게 이렇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배경이 된 시애틀의 가을은 내내 안개가 자욱하거든요. 🌫 하지만 이런 흔한 도심의 풍경도 애나에겐 오직 3일 간만 허락됩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허락된 3일간의 외출은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엔 부단히 짧은 시간이지만, 애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가 30불을 빌려달라며 시계를 담보로 맡기거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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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7년째 복역 중입니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애나는 모든 게 낯설기만 하죠. 🏠 엄마의 죽음, 유산 이야기를 꺼내며 서류를 들이미는 가족들, 불쑥 커버린 조카 등 공백의 세월 동안 애나의 집엔 더 이상 애나가 마음 둘만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집을 나서서 방황하던 때, 애나의 앞엔 ‘훈’이 등장합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던 애나에게 30불의 빚을 진 남자요.
훈 또한 마음 둘 곳 없이 쓸쓸한 가을길을 방황하던 중이었습니다. 외로운 여자들을 갈취해 생활을 이어 나가 온 훈은 그들 중 한 명의 남편에게 쫓기는 중이거든요. 각자 무언가로부터 쫓기고 있던 서로를 알아본 듯, 둘은 함께 시애틀의 거리를 누비며 쓸쓸한 조급함으로부터 잠시 벗어나죠. 🍂 시간에 쫓기던 애나는 훈과 보내는 시간 동안 용기 내어 과거의 사건과 감정을 들여다보고, 또 현재에 감정에 충실해보기도 합니다. 진심을 속여 누군가를 꾀어내기만 했던 훈 또한 애나에게만큼은 마음에 있는 솔직한 말들을 전하고요.
그렇게 둘은 짧은 시간 동안 말과 문장만으론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동질감을 나누며 쌀쌀한 계절을 따뜻한 위안으로 채우게 됩니다.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신가요? 마침 오는 11월 8일,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을을 가을답게 담아낸 <만추>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다고 하니, 극장에서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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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께 다다른 DADA letter, 어땠나요?
정말 가을을 안 탈 수가 없는 레터죠? 코트 소매를 괜히 당겨보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따뜻한 라떼를 홀짝거리고... 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피드백 링크에 단풍 명소를 소개해주시면, 인스타그램에 모두 소개해드릴게요. 다다레터는 ☂️ 혜화 학림다방과 🙊 우이동 계곡을 추천해요! 즐거운 가을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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