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8

당신에게 다다른 #16번째 레터

한밤의 대도시를 걷다 말고, 허공을 잠시 바라봅니다. 👁 어김없이 아파트가 시야에 끼어들어요. 제각기 다른 이름과 구조를 갖고 있겠지만, 밖에서 보는 아파트는 사각형의 연속에 불과하죠. 꼭 차곡차곡 쌓인 불빛 상자들 같네요. 하지만 그 안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면, 조금씩 다른 게 보입니다. 어떤 집 거실에는 샹들리에 조명이 빛나고, 어떤 집 창문에는 뽀로로 스티커가 붙어있고, 어떤 집은 커튼 대신 블라인드를 달아놓았거든요. 같은 도시,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살더라도 우린 모두 다른 집에 살지요. 당연하지만,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상하게 둥근 조명, 하얀색 몰딩, 똑같은 넓이. 이들은 분명 같은 건물에 살긴 하는데...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온도로 삶을 꾸려가고 있어요. 첫번째 가족은 쑥스러움이 많아보이는 남매와 하얀 강아지가 함께 살고요, 두번째 가족은 소파에 무려 바이올린을 멋지게 올려두는 뮤지션들인 것 같아요. 🐩🎻 이들의 공통점은 거주지에 불과한데도, 너무나 재미있지 않나요? 저는 특히 강아지의 이름은 무엇일지, 가족들의 합주 선율은 어떠할지 무척 궁금해요.

이렇게, 작품 <상록타워>는 우리에게 아파트를 실제로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히 알고 싶게끔 만듭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정말 자연스러운 거예요. 실제로 전시회에 온 모든 상록타워 주민들은, 자기들의 사진보다는 이웃집 사진들을 더 보고 싶어했대요. 사진 속 트로피나 카페트를 바탕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셜록 홈즈처럼 추리하기도 했고요. 🔍 우리는 여전히 그 곳을 궁금해하고, 내심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이웃집이 담 너머에 있대도 그 집 딸이 뭘 잘하는지, 수저는 몇 벌 있는지까지 알고 살았대요. 이제 우리는 아파트라는, 더 가깝고 비슷한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를 억지로 모른 척 하려고 애쓰죠. 그게 이 시대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여전히 이웃은 그 이름과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이유 모를 애틋함과 친밀감을 주는 듯 합니다. 💘

소개글을 잠시 들여다볼게요. “한강 조망권 지키려다가 한강에 시체를 유기한 여자들의 이야기. ‘내 집값은 내가 지킨다!’” 한강과 조망권, 집값까지는 연결이 잘 되는데… 갑자기 시체 유기라뇨? 😱 누가 봐도 아주 작정하고 매운맛으로다가 만든 막장 작품 같다고요? 놀랍게도 작품 속 사건과 인물들은 지극히 현실 속에 있을 법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조금만 파고들어 보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교묘히 연결되어 있죠. 웹툰 속 노블 골드 캐슬 부녀회는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 한강 조망권과 집값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 하지만 이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은, 놀랍게도 정의감과 책임감에서 비롯됐어요. 바로 좋은 환경에서 비롯되는 좋은 삶, 행복한 삶을 나 뿐만 아니라 내 자식과 아파트 주민들에게서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야말로 삶의 목적과 수단이 주객전도된 행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에잇톤 트럭처럼 스스로 멈추지 못합니다. 좋은 삶에 대한 집착이 아파트라는 물질로 향했기 때문이죠.

더욱이 작품에 여성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 웹툰이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말을 내건 것은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권력에 있어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수성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오랜 시간 동안 주로 남성에게 일임되었던 권력이 아파트 내에서는 단지 안사람들로 치부되었던 여성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죠. <위대한 방옥숙>은 그동안 부와 권력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왜 부녀회가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이 특별한 일처럼 여겨지는지에 대해 고찰하게 만듭니다. 🤔

이렇게 <위대한 방옥숙>은 아파트에 대한 시선을 다채롭게 풀어냅니다. 웹툰은 방옥숙 여사의 연애 시절 다짐을 보여주며 끝이 나는데요. 우리가 아주 지독하다고 느낄법한 그도, 한 때는 물질이 아닌 삶 자체에 대한 소망이 있었고 신념이 있었겠죠. 아마 우리 역시 계속 아파트를 꿈꿀 것 같긴 하지만, 😅 가끔은 아파트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꿈꾸며 살아가 봅시다. 😌

이경미 감독은 일상적인 소재를 초현실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감독입니다. 이 영화 또한 처음엔 담배연기로 고통받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듯 싶다가, 등장인물이 하나씩 등장하며 이야기가 미궁으로 빠지죠. 😵 극 초반부를 넘기고 나서부터는 지금 이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낡은 주공아파트는 이런 이경미 감독의 색깔을 고스란히 나타내는데 효과적인 장치가 됩니다. 익스트림 롱 숏¹⁾ 으로 담아낸 끝없이 길게 늘어진 복도, 똑같이 생긴 세대의 나열은 아파트를 더욱 단조롭게 반복되는 패턴처럼 보이게 하거든요. 이런 이미지는 이내 담배의 굴레에 갇힌 희지의 세상이 됩니다.

얼굴도 모르고 살지만 욕실 환기구와 하수구를 통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지극히 남이면서 하나이기도 합니다. 결말부에 가서 영화는 조금 뜻밖의 주제로 마무리되어요. 어지럽게 느껴졌던 15분의 난장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 깨달으실 거예요. 왜 영화의 배경이 ‘아파트’ 여야만 했는지. 왜 우리가 서로를 괴롭게 했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