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란 것의 특성은 결국,

재난에 휘말린 사람의 개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본문 中 - 

모든 사람들을 섬에서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토 사람들은 섬 주변 바다의 배 위에서 머물며 지냈어요. 🛶 그러던 중, 어린아이를 씻겨주던 애슐리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혔습니다. 곧 그 사진은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본토와 섬, 그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애슐리를 유명인으로 만들었어요. 황폐화된 세상을 ‘돌봐줄’ 어떤 이의 모습이 사람들은 간절했던 거죠. 🙏

그러니까 개인이 얼마나 선량하고,

얼마나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 본문 中 - 

재해가 닥친 순간, 이 세상의 판단력은 납작해져버립니다. 모두의 두려움을 잠식시킬, 혹은 달래줄 인물, 즉 슈퍼맨과 나이팅 게일을 찾기 시작해요. 🫂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을 찾는 순간, 자연히 그의 이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소멸됩니다. 죽고사느냐의 분투 속에서 그 이외의 의심은 사치이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특정 인물을 특정 역할 속에 가둔 채 우리를 안심시키기 마련입니다.

<섬의 애슐리> 속 본토와 섬사람 역시도 재난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제해줄 사람을 찾았어요. ‘강력한 리더십의 박력감’을 가진 어떤 이를 기대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 자리는 ‘아투’라는 인물의 몫이었어요. 재난의 현장을 헤집고 다니며 아투는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켰습니다. 🏃 그 욕망이 세상에, 그리고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아무런 제재 없이요. 뿐만 아니라 애슐리에게 청혼하며 ‘세상을 구원할 완벽한 커플’을 결성하기도 해요.

하지만 재해로부터 본토가 어느 정도 복구되자 사람들은 섬을 떠날 채비를 시작해요. 구원의 공간이었던 섬의 가치가 흔들리자 위기감을 느낀 아투는 슈퍼맨 드라마의 또 다른 사건을 구상합니다. 🕳️ 아투가 만들어내는 다음 드라마가 궁금하시다면, 정세랑 작가의 짧은 단편 <섬의 애슐리>에서 확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소설 밖,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다시 바라볼까요, 일상의 크고작은 혼돈들은 물론 소설 속 재해상황보다는 덜 극적일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재해의 상황을 우리 삶의 혼란과 혼돈의 순간들로 치환한다면, 우리 역시도 그 순간을 무마하기 위해 허용되지 못할 것들을 허용했던 때가 분명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내 눈앞에서 일어난 나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언하는 것은 단순 공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비판하기엔 부주의한 말들이 이미 만연해요. 게다가 이는 올해 국내에서 일어난 재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불행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해 문제에 다양한 혐오 문제가 함께 발생하고 있어요. 🌍 이웃나라에서 일어난 자연재해를 두고 자업자득이라는 댓글이 달린다거나, 먼 나라의 참사에 종교를 운운하는 댓글에는 적지 않은 좋아요 수가 쌓이기도 합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정확히는 우리의 지나친 타자화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재해일지도 모르겠어요. 👤

한바탕 재해가 지나가고 난 후, 남은 잔재들을 살펴봅시다. 정리해야 할 것들 중 유독 눈에 띄는 것들이 있어요. 💬 “저의 부주의한 언행으로..”, “깊이 반성합니다.”, “상처 입으신 분들에게..” 등의 말들이요. 우리가 쓸어 담고 정리해야 할 것들 중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타자화’란 타인을 ‘우리’의 영역에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해요. 물론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 만큼 공감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지랖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아픔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해자를 ‘타자화’ 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재해는 ‘우리’의 일이잖아요.

빅터는 공항에서 살기로 작정해요. 🧳 스타벅스 냅킨으로 간이 식탁보를 만들고, 버려진 의자들을 고쳐 침대로 만듭니다. 당연히 그는 공항의 골칫거리가 돼요. 깔끔하고 안전해야 할 공항에 노숙자라뇨! 몰래 출국장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찔러줘도, 그는 “I. WAIT.”(나. 기다린다.)를 외치며 공항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떳떳이 자기 여권에 도장을 받고, 심사관에게 “TOURIST!”라고 외치고 싶었을 거예요. 당연한 권리이니까요.

공항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칩니다. 매일 공항을 쓸고 닦는 노동자, 구두 굽이 부러진 승무원, 아버지의 약을 밀반입 해야 하는 여행자… 그리고 공항의 노숙자가 된 그 스스로까지. 그들을 친절과 재치로 대하는 빅터의 모습을 보다보면, 우리는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서로 다른 모양의 재해가 있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21세기에는 고통마저 공평하지 않게 닥치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요. 👿 빅터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시계가 바삐 움직이는 공항에서 노숙자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죠. 또, 그의 사연은 픽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인천 공항에서도 🔗콩고 출신 루렌도 가족이 난민 인정 심사를 받지 못해 287일간 노숙 생활을 이어간 적이 있었어요.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정교해짐과 엉성해짐을 반복하며 존재하는 까닭에, 재해 역시 새로이 정의되는 시대에 도착해있네요. 👣

후반부에서 그들이 함께 놀았던 학교엔 눈이 내리는 ‘겨울’이 찾아와요. 반면 멤버들이 주로 머무는 세계는 꽃이 휘날리며 떨어지는 ‘여름’이죠. 어느 것이 실제인지 혼동되는 찰나, 영상 말미에서 따뜻했던 여름은 사실 스마트폰을 통해 재생된 영상의 풍경이라는 것이 밝혀져요. 스마트폰은 차가운 눈밭에 파묻혀(!) 있고요. ❄️ 이 결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함께 만나 추억을 쌓았던 여름은 이제 그리워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가상공간에서만 가능하다는 걸까요? 어느 쪽이든, 오프라인 공간에서 함께 만들어가던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암시하는 듯합니다.

Hot summer time (우리가)

바랐던 날 (그저 평범한)

여름의 나 (여름의 너)

Can't we go back

Hot summer time (summer time)

사라지지 마 (지금 달려가)

너를 찾아 (우릴 잊지 마) We go on

노래가 발매된 즈음과 달리 지금은 음악방송 방청이 재개되었고, 공연장에선 떼창도 가능해졌어요.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만 같죠.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재해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온라인에서 여전히 각종 이벤트가 열리고, 학생들은 비대면 수업에 익숙하죠. 노래가 수록된 앨범의 제목 ‘Blue Hour’는 완전히 어둡지도, 밝지도 않아서 오묘한 색상의 하늘을 볼 수 있는 해 질 녘과 해 뜰 녘의 시간대를 의미합니다. 코로나19로 고군분투하던 우리의 시간은 어쩌면 변화의 경계, ‘Blue Hour’였던 모양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