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2

당신에게 다다른 #9번째 레터

아무리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해도 망할 수 있어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거든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모든 게 내 맘처럼 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몰락하는 풍경을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지요. 흘러가는 상황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전략, '피봇팅'을  제안합니다. 💡

피봇(Pivot)이라는 어원을 잠시 살펴볼게요.

컨트롤하기 어려운 환경적인 요인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일단은 그나마 믿고 디딜 수 있는 구석에 기댄 뒤, 변화를 주는 게 피봇팅의 핵심이에요.

피봇팅을 정의한 에릭 리스 ¹⁾는 스타트업의 생존전략에 대한 단서를 농구게임에서 찾았어요. 스포츠랑 비즈니스는 완전히 다른 영역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에릭 리스는 몰락하는 스타트업의 CEO들에게 농구선수들의 피벗 플레이를 벤치마킹할 것을 제시했어요. 🏀 공을 잡은 선수가 적팀을 피해 한 발로 지탱한 채, 다른 발을 여러 방향으로 옮겨 딛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엿보며 움직이는 피벗 플레이. 열심히 준비해도 모든 걸 예측할 순 없듯,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된 이후 예상치 못한 시장 상황이나 고객 반응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한 발은 지탱한 채, 다른 방향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죠. 기존에 회사를 지탱하고 있던 비전과 목표는 그대로 유지한 뒤, 응급책으로 비즈니스 모델이나 경영전략에 변화를 주는 것이, 즉 피봇팅이에요.

찬실이가 복이 참 많기로 소문이 났대요. 평생 같이 일할 줄 알았던 감독님이 회식 자리에서 돌연사를 했고, 새로 이사한 집은 동네 꼭대기에 있고, 프로듀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는데 나이가 많다고 불합격당했고, 연애 사업도 잘 안 풀린다던... 찬실이 걔 말이에요. 그게 왜 복이 많은 거냐고요? 인생을 아주 종 쳤다고, 굿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 조금만 더 들어봐요.

알아요, 당신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것도.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어도, 이런 상황 앞에서는 절망하게 될 거예요.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죠. 하지만 찬실이는 복이 많아요, 정말로. 그 모든 불행과 몰락 덕분에, 찬실이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기 시작하거든요. 평생 프로듀서를 하리라 생각했던 그는 감독의 부재 덕분에 자신만의 각본을 써 내려가고, 억울한 장국영을 닮은 귀신의 힘으로 용기를 얻고, 위치는 꽝이지만 인심은 짱인 집주인 할머니 덕에 그간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릴 수 있게 돼요.

이래도 찬실이가 복이 없는 것 같다면... 영화 바깥으로 잠깐 나와볼래요? 👣 이 영화를 만든 김초희 감독은 몇 년 전 영화 속 찬실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합니다. 자신이 해온 '영화'라는 일을 잠시 돌아보며, 그럴듯한 결실이 없음에 회의감을 느꼈대요. ¹⁾ 찬실이가 곧 김초희이고, 김초희가 곧 찬실이인 셈입니다. 그때 그를 다시 영화로 돌아올 수 있게 한 건 바로 배우 윤여정이었어요. 마치 영화 속 집주인 할머니처럼, 몰락에 갇힌 그를 위로하고, 자전적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들 수 있도록 이끌었죠. 그것도 모자라, 영화에도 실제로 출연해 진심 가득한 연기를 보여줬어요. 거장 배우의 독립영화 출연을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윤여정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것이라 했다. 나를 두고 쓴 것이니 내가 했다."고 얘기했고요. 🥰

김초희 감독은 자신의 몰락을 웃음과 온기로 한껏 감싸 이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진득한 슬픔과 고뇌를 담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어요. 대신 그 안에서 발견한 반짝거리는 순간들과 귀한 위로들을 전했죠. ✨ 영화 속 찬실이가 보여준 '복'은 김초희 감독에게는 들꽃영화상 대상으로, 강말금 배우(찬실이 역)에게는 신인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몰락 안에도 기쁨과 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걸 알게 된다면, 당신에게 몰락은 더 이상 몰락이 아닐 거예요.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곳은 새로운 도약점이자, 숨을 돌릴 수 있는 들판이 되어주겠죠. 🌱